Interview
현대인들의 무의식과 양면성을
이야기하는 '김판묵'
Q. 자기 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현대인들의 가면(페르소나)을 매개체로 내면과 외면 사이에서 나오는 무의식과 양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 김판묵입니다.
Q. ‘양면성’에 대한 내용이 자주 나와요.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대학원 조교 생활을 했었어요. 대학교도 학교라는 물리적인 울타리가 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작은 사회잖아요. 학부 때 경험해보지 못했던 교수님들의 모습이라던지 학생들을 챙겨줄 때 저는 직원이니까 후배로만 볼 수 없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에서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 제 스스로가 가면을 쓰게 되더라구요. 항상 가면을 쓰고 있는 느낌 이였어요.
제가 조교 일을 하기 전에는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무료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로봇 이미지로 작업을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사회 생활을 하면서 점점 더 두꺼워지는 ‘가면’에 대해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내면과 외면의 다름, 나아가서는 사회에서 보여지는 아이러니한 현상들에 대해 다루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얘기하고 싶어 ‘방독면’이라는 소재를 결정하게 되었고, 방독면을 통해 가면(페르소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Q. 방독면을 소재로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세요?
군대에서 방독면을 썼던 때가 떠오르더라구요. 방독면은 일차원적으로는 하나의 가면이죠. 나를 외부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쓰고 있을 땐 상대방에게 내가 내뱉는 말들의 전달이 힘들어 수식어로 얘기해야만 하죠. 그리고 굉장히 제한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기도 하고요. 그런 점들이 살아가는 삶과 맞닿은 지점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 가면이라는 주제를 방독면이란 소재에 접목시켜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Q. 다루는 주제나 방독면이라는 소재를 생각해보면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이 들것 같은데, 지금 작품들을 보면 전체적으로 컬러풀한 느낌이에요.
양면성이라는 부분을 더 극대화시키고자 한 의도일까요?
2013. Filter Temptation
2015. 침묵의 시선(Gaze of silence)
2021. Instant Syndrome
이 색깔을 찾기까지 오래 걸렸던 것 같아요. 2010년도부터 작업을 했었는데 그때 작업을 보시면 굉장히 어두워요. 방독면의 색깔도 많이 안 들어가고 대부분 검정색으로 표현했어요. 굉장히 어두웠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조교가 끝나고 나서도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면서 대부분 작품들이 어둡게 표현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2017년도 개인전에서 SNS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 제 자신을 찾는 진중한 시간과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원하는 색감과 사회적 가면에 가려진 내 안에 있던 욕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컬러감이 확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제 안에 갇혀 있던 저 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17년도 이후 항상 밝고 채도가 높은 작품만 나왔던 건 아니에요. 작업을 하면서 연도마다 제가 집중하는 사회적 문제라던지 제가 바라본 세상의 아이러니한 현상들에 대해서 작업을 하다보니 2017년에는 밝긴 했지만 2018년도에는 모노톤의 스타일이 나오기도 했고. 2020년도에는 기하학적이고 개념적인 작품이었고요. 작품 스타일의 변주가 있긴 하지만 이게 저 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도 확실히 이건 얘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그려 왔던 작품들 중에서 지금 작업하는 작품들을 그릴 때가 가장 재미있는 것 같아요.
Q. 최근 작업이 가장 재밌다고 느끼는건 왜 일까요?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게 제 색깔인 것 같아요. 조금 내성적이긴 하지만 가면 안에 감춰져 있는 제 모습은 톡톡 튀는 거죠.
Q. ‘방독면’과 ‘사과’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네요.
방독면과 사과는 제 작품에선 빠질 수 없는 기호로 등장하고 있어요.
방독면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면을 뜻하고 왜곡된 소통, 제한된 시각, 필터링, 가면에 의한 안도감, 경계 등 제가 바라본 세상의 아이러니함을 담아내는 저만의 기호인거죠.
사과는 욕망의 산물 그리고 무분별하게 우리의 시각에 노출되고 버려지는 이미지와 제도의 기준, 타인들의 삶 등을 보여주는 기호이구요.
현재를 살아가며 보고 느끼는 감정들을 저의 대표적인 기호인 방독면과 사과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어요.
Q. 사과가 유혹의 산물이라면 먹음직스럽게 빨갛고 보기에도 예쁜 원형일 것 같은데, 작품에 나온 형태를 보면 앙상한 사과로 표현되어 있어요.
제가 SNS에 관심이 많아요. 보다 보면 SNS에서 보여지는 타인들의 삶에 대한 이미지들이 삶의 한 기준이 되어 살아가는게 요즘 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매일 호텔방에서 멋진 사진을 찍으며 보낸다거나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물건들의 멋스러운 사진들이 매 순간 올라 오고 누구에게나 노출되고 있지요.
그런 이미지들을 보면 저도 마찬가지로 끌려가기도 하죠. 막상 내가 원해서 가졌더라도, 이게 정말 내가 원했는지 내가 원하는 삶이 맞는지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공허함만 남기도 하고요. 그래서 다 먹어버린 앙상한 사과가 등장 했던 것 같아요.
Q. 유독 애착이 가는 작품이나 시리즈가 있을까요?
* 자아상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 Loss of ego 시리즈 중 Cold Evolution(2017)
아무래도 제가 사회를 직접 겪어가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표현하다보니, 그 한 해 한 해 나온 작품들 모두 다 애착이 가요.
그 중에서도 고르라고 한다면 17년도 작품 중에 껍데기를 벗어 던지는 작품이 있어요. 두꺼운 점퍼를 입고 있다가 그걸 벗어 던지는데 얼굴이 연기로 변하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데, 애착이 가는 이유는 그 당시에 저의 내면으로 정말 깊게 들어갔었고 그때의 심정이 온전히 담겨져 표현 되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무엇 때문에 왜 존재하는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보면 타인이 좋아해서 혹은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좋아하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들 또한 타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내가 정말 존재하는건지, 타인들이 만들어준 내가 존재하는 건지에 대해서 헷갈리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내가 알고 있는 나에 대한 껍데기를 벗어 던졌을 때 그 안에 내가 과연 있는지. 그런데 막상 껍데기를 던져 보니까 내가 없더라고요. 허무했어요. 그래서 얼굴 없이 연기로 표현된 것 같아요.
내가 없기 때문에 나는 타인이 될 수도 있고 타인이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렇게 우리는 차갑게 진화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Cold Evolution' 란 타이틀을 붙이게 되었죠. 그래서 더욱 이 작품이 애착이 가네요.
Q. 영감들은 주로 어디에서 받으세요?
노래 가사, 영화 그리고 특히 잡지에 나오는 패션 이미지들에서 많이 받아요. 내 스타일을 어떻게 접목시키면 되겠구나 하며 생각도 많이 하고요
Q. 군산에서 작업을 하고 계시잖아요. 그 지역을 택한 이유가 있으세요?
근본적인 이유는 군산에서 대학을 다녔고, 조교 생활도 했고, 친한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이곳에서 성인이 되었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에 지냈던 곳이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있어요.
사실 군산에 있다가 심리적으로 너무 안좋아져서 본가에 올라가서 1년정도 작업을 했었어요. 혼자 작업실을 썼는데, 소통할 수 있는 동료가 없다 보니 작품은 어두워지고 수량도 얼마 나오지 못했죠. 혼자 작업하는게 제 성향상 안 맞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제가 식구들과 작업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들을 부모님도 어느정도 알고 계셨어요. 응원해주시는 부모님들과 군산에서 반겨줄 수 있는 선배가 있어서 다시 군산으로 내려와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Q. 작가님한테는 군산이 또 다른 안식처이네요. 있으면서 불편함은 없으세요?
네, 맞아요. 저에게 안식처가 되었어요. 불편한 점이라기 보단 아쉬운 건 군산에는 전시장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가까운 전주만 가도 갤러리들이 곳곳에 있고 하는데, 군산은 몇 개 없는게 현실 이에요.
그리고 서울이나 경기도와는 다르게 전시를 하더라도 방문해서 관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게 또 다른 아쉬움이구요. 6~8개월동안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물을 선보였는데 관심이 없다면 그만큼 허무한 일은 없을 거에요. 그래서 올라가서 작업하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 과거 힘들었던 일들이 생각나서 여전히 두려운 건 사실이에요. 그래도 자연스럽게 기회가 찾아오거나 기회를 만들게 된다면 다른 지역 다른 공간에서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Q. 만났던 관람객 중에 기억에 남는 분이 있으세요?
심리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어두웠던 시기에 작품을 구매해 주셨던 대구에 사시는 컬렉터 분이 계셔요.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저와 인생에 대해서 대화도 많이 나눴고, 작품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 때 그 분께서 미술관이 원하는 작품을 할 것인지 아니면 페어에서 판매할 수 있는 대중적인 작업을 할건지 물음을 던져 주셨어요. 판묵 작가를 봤을 때 그 경계에 있는 것 같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서 간다고 해서 나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조금은 방향을 선택해서 가는게 좋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말씀해주셨어요.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어요.
Q. 작가님은 작업 과정들이 어떻게 되세요?
일상 생활을 하다가 영감을 받으면 바로 드로잉을 해요. 거의 대부분 드로잉을 토대로 실재 작품에 옮겨가는 작업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아이패드를 주로 사용해서 드로잉을 해요. 디지털 작업으로 드로잉을 하고 그걸 다시 실재하는 화판에 옮겨서 다시 그리고 있어요.
이렇게 작업을 진행 하면서 느꼈던 게 있어요. 디지털 작업이 어떻게 보면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상에서 그려진 건데 그 이미지를 다시 현실로 옮겨서 작품이 마치 프린팅 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거든요. 그리고 작품을 촬영 해서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내고 이 이미지로 많은 곳에 홍보를 진행하고요. 가상과 현실의 경계와 구분이 모호해지고 서로 넘나들며, 너무 다르지만 너무도 같은 두 세계를 순환하는 현상을 직접 작품 제작 과정에 담아내고 있어요. 최근에 제가 가장 집중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 사회적 변화인 것 같아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가상과 현실, 진짜와 가짜, 원본과 복제 등 극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것들이 더욱 더 모호해지고 서로의 영역을 흡수하고 복제하는 이런 모습들은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현재이며 마주해야 할 변화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렇게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Q. 처음부터 작가로 나아가려고 하셨었어요?
화가가 하고 싶었어요. 그 매력을 느낀 건 대학교 4학년 때인데, 졸업 작품을 하면서 정말 많이 느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로 뱉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이미지를 통해서 내가 생각한 메시지를 전달 한다는 게 너무 매력 있더라고요. 그래서 작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Q. 전업 작가로 하면서 힘드셨던 적도 많으실 것 같아요.
지금은 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어요. 솔직히 월급이 많지는 않아요. 보통은 재료비나 활동비를 충당하기 위해 벽화 알바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림 그리는 시간을 뺏길 정도로는 절대 안해요.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분들에 비해서는 지금의 삶이 물질적으로 힘든 건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적어도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너무 많은 것들에 욕심을 내긴 아직은 어려운 것 같아요. 너무 큰 욕심보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더 집중하려고요.
Q. 만약 내가 전업 작가를 안하고 있었더라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횟집에서 회를 썰고 있었거나 아니면 만화가를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하하)
중학교 때 꿈이 많았어요. 만화가도 되고 싶었고 자동차 디자이너도 되고 싶었고. 원래 꿈이 애니메이터였어요. 만화책보면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었고요. 그걸 하면 주변에서 칭찬을 많이 해주셨고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그림에 더 끌렸던 것 같고.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된게 아닌가 싶어요.
횟집을 이야기한건(웃음) 제가 힘들어 했을 당시 아버지께서 ‘너 이런 식으로 작업 안하고 있을 거면 친구가 횟집 하니 거기에서 일해’라고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이렇게 완강하게 말씀 하신 건 처음 이였는데 그걸 듣고 정말 고민이 많이 되었어요. 아버지께 그래도 ‘이왕에 작가로 활동 하기로 한 거 끝까지 해보겠다 다시 군산으로 내려가서 열심히 활동해보겠다’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아버지가 그 얘기를 듣고 싶으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한 번 열심히 해보겠다 라는 얘기를 저한테 직접 듣고 싶으셨다고.
부모님께 항상 감사해요. 전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그 어느 누구보다 항상 응원해주시고. 작가로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건 부모님이예요.
Q. 부모님께서 지지를 많이 해주시는 것 같아요.
심리적으로 의지할 수 있게 많이 버텨주세요. 너는 엄마 아빠와는 다르게 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그걸 놓지 말고 끝까지 하라고 해주세요. 제가 힘들어 할 때면, 누구든 하고 싶은걸 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자연스럽게 있고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항상 얘기해주세요.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도록 항상 열심히 해보라고요.
Q. 해외에서 작업이나 전시는 안해보고 싶으세요?
저는 독일과 뉴욕에서 한번 전시해보고 싶어요. 독일에서는 이전에 작업했던 개념적인 작품이나 전통 재료들로 묘사된 작품으로 선보이고 싶고, 미국에는 요즘에 작업하는 instant syndrome 시리즈 작품들로 선보이고 싶어요. 중국에는 작년에 상하이에서 선보이게 되었어요. Instant 시리즈와 Gaze of silence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다행히도 많은 작품들이 판매되었어요. 의외로 해외 쪽에서 더 반응이 좋은 것 같아요(웃음)
Q. 작가님께서 언젠간 해보고 싶은 작업이나 어떤 꿈을 꾸고 있으세요?
외국에서 초청을 받아 전시를 해보고 싶어요.(웃음) 사실 그것보다도 궁극적으로는 제 작품을 보고 여러 사람들이 ‘김판묵 작가 작품이네?’ 라고 하는 작가가 되는 거. 그게 가장 큰 목표예요. 누구나가 김판묵 작가는 이런 스타일이야. 듣는 것이 작가로서의 꿈인 것 같아요.
김판묵 작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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